아침부터 술에 취한 서울역광장 노숙자들



[체험르포] 2009 가을, 노숙자 그들은 누구?(1)


''세상에 사기 당했다. 오로지 할 것은 소주 먹는 일뿐!''

모두가 고향으로 향하는 추석 연휴의 서울역. 하지만 역사 곳곳에서는 여느 때처럼 악취를 풍기며 잠든 노숙자들이 보인다. 명절에도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채 술기운으로 하루를 보내는 서울역 노숙자들의 생활을 2박3일 동안 조선닷컴의 인턴 기자가 직접 체험했다. / 편집자 주

열흘간 기른 수염, 먹물을 섞은 물에 세수해서 만든 땟국 흐르는 얼굴, 머리에 젤을 잔뜩 바른 후 놀이터 모래에 사정없이 비벼 만든 지저분한 두발. 곳곳을 담뱃불로 지지고 칼집을 낸 목 늘어진 티셔츠. 영락없는 노숙자의 모습으로 추석 연휴를 이틀 앞둔 지난 9월 30일 밤 서울역 광장으로 향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쌀쌀한 날씨에 옷깃을 여민 노숙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고 있다. 광장 한 쪽 구석에 박스를 깔고 앉아 누군가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며 소주 한 병을 꺼내 한 모금 마셨다. 서울역 특유의 지린내가 풍겨온다. ‘대전에서 빵집을 운영하다 망해 갓 상경한 34살 용띠 청년 서씨’로 위장한 기자의 2박3일 서울생활이 시작됐다.

◆ “젊은 사람이 안 됐구먼”

바로 옆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노숙자 3명 중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어이, 새우깡 좀 같이 먹자.” 소주와 새우깡을 들고 합석해 거리로 나오게 된 사연을 털어놨다. 유심히 듣던 50대 중반의 한 고참급 노숙자가 노숙생활을 시작한 지 두 시간밖에 안 된 ‘신참’에게 점잖게 말했다. “젊은 사람이 안 됐구먼. 우리야 살만큼 살았지만 자네는 이 생활에 절대 빠지면 안 돼.” 일장 훈화를 들으니 자정 무렵이 됐다. 인사를 하고 역 주변을 배회했다.

대합실 문을 닫자 노숙자들은 광장으로 나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뿔뿔이 흩어져 시간을 보냈다. 오전 2시쯤 대합실이 다시 개방되자 하나 둘씩 잠을 자러 들어갔다. 인적이 뜸해졌다. 새벽 광장의 모습을 한눈에 보기 위해 광장 입구에 있는 네모난 대형화분 하나에 몸을 기댔다. 몸이 으슬으슬 떨려 먹물 잔뜩 묻힌 담요를 꺼내 덮었다. 수은주는 17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에어컨을 가장 세게 틀어놓은 것과 같은 온도였지만, 얇은 예비군복 바지와 면티셔츠로는 가을 밤바람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눈앞에는 50대 아줌마 네댓 명이 행인을 윤락가로 안내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숙자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담뱃불을 빌려달라”며 30대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그는 “아침 6시에 명동성당에서 미사가 있으니 꼭 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한쪽에서는 노숙자 2명이 목청껏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오전 3시30분 서울역사 입구 쪽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 3명이 출동해 건장한 양복쟁이 두 명을 데려갔다. 밤사이에 싸움만 세 번 목격했다.

추위는 시간이 갈수록 더해졌다. 나무 널빤지에 의지해 바람을 피할 생각으로 서울역 주 출입구쪽에 자리를 잡았지만 소음탓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시 부근 대형마트의 하수구 옆으로 이동해 코를 막고 겨우 잠을 청했다.

하지만 아침 5시가 지나자 첫차를 타러 온 승객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대형마트 입구 하수구 옆에서 박스를 깔고 누워있는데 경비업체 직원이 “아저씨, 일어나요”라고 하며 쫓아냈다. 박스를 주차장에 잘 숨기고 대합실로 가서 아침뉴스를 보고 있는데 공익요원들이 “열차 이용하실 분 아니면 어서 나오라”고 해서 광장으로 쫓겨났다.

 

 
노숙자들과 배식을 기다리는 허성호 인턴기자(앞에서 세번째 회색상의 입은이) 

◆ 일감 없는 날엔 아침부터 술

하루 종일 놀고 먹는다고 알려진 노숙자. 근로의욕이 아예 없는 사람도 있지만 상당수는 노동을 한다. 그들의 일과는 대개 당일 일감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전 5시30분을 전후해 서울역 광장의 ‘헌혈의 집’에는 일용직 구인공고가 붙는다. 인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승합차를 끌고 와 직접 필요한 사람을 데려가기도 한다. 10월 1일 아침. 짧은 추석연휴를 목전에 두고 있는 탓일까? 일감이 없었다.

서울역 광장에는 일감을 구하지 못한 노숙자와 일용직 근로자 100여 명이 3~6명씩 모여 앉아 있다. 모두들 술을 마시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광장을 정처 없이 걷고 있는데 한쪽 구석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40대 노숙자 2명이 말을 건다. “담배 없냐?” 비흡연자이지만 필요할지 몰라 담배 3갑을 준비했던 터. 주머니에서 2개비 꺼내 건네며 불을 붙여줬다. 비닐봉지에서 소주와 새우깡을 꺼내 “함께 먹자”고 하자 무척 좋아했다.

그 중 한 명인 노숙 14년차 김모(43)씨는 술에 찌들어 있었다. 그는 “서울 관악구에서 인테리어 가게 2곳을 운영했다”면서 “무리한 확장이 화를 불렀다”고 자책했다. 김씨가 한(恨) 많은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동료 노숙자들이 하나 둘씩 모여 6명이 합석하게 됐다. 멀끔해 보이는 한 50대 노숙자가 내 사연을 유심히 듣더니 “젊은 사람인 만큼 의지만 강하면 금방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며 “연휴 끝나면 내가 직접 일자리를 알선하겠다”고 호의를 베풀었다.

김씨는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 시간 만에 소주 4병을 비웠다. 그는 돈 1000원을 쥐어주며 “저기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 한 병만 사 달라”고 부탁했다. 근처 포장마차에 가보니 소주 한 병을 1500원, 종이컵을 개당 100원에 팔고 있었다. 근처에 있던 한 노숙자에게 “여기서 많이 사 먹냐”고 묻자 “편의점까지 가기도 귀찮고 주인 성격이 좋아 늘 여기서 사먹는다”고 하면서도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폭리를 취하고 있다”며 불만스러워했다.

◆ 악덕 업주에게 사기 당해 근로의욕 상실

김씨와 만난 지 한 시간 만에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다. 그는 여느 알코올중독자와는 달리 지나치게 온순하고 친절했다. 옆에 있는 김씨의 동료로부터 그가 술에 빠진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용산의 한 이삿짐센터에서 1개월간 일했지만 업주가 도주해 임금 210만원을 떼였던 것. 근로의욕을 완전히 상실한 그는 2개월째 술로 울분을 달래고 있었다.

그는 “동생,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라며 기자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오전 10시쯤 종교단체에서 무료급식을 나왔지만 그날 우리의 아침 겸 점심은 오로지 소주였다. 김씨는 오전에만 소주 8병을 마시고 광장 한 구석에 쓰러져 잠들었다. 기자도 소주 3병을 마셨다.

전날 안면을 튼 윤모(49)씨가 취기 가득한 얼굴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무료해서 시간도 잘 안가고 친구 사귀기도 힘들다”면서 “이곳은 술을 입에 댈 수밖에 없는 곳”이라고 말했다. 기자 역시 2박 3일 내내 소주 15병 가량을 마시면서 ‘친구’들을 사귀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술에 취해 거리에 누운 노숙자들이 늘어갔다. 용산구청의 물 청소차가 거리에 물을 뿌렸지만 노상방뇨로 인한 지린내의 정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

[허성호 인턴기자]